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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신라의 위인 강수 혜초 장보고 최치원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4.

 신라에서는 왕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적 위인들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이들은 정치, 군사, 학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기며 신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어 나갔다. 

 

강수(强首 ~ 692년)

  강수는 통일신라의 유학자, 문장가이며 한문학에 매우 뛰어나 20세가 되기 전에 벼슬길에 올랐다. 태종 무열왕 1년(654년)에 당나라에서 보내온 난해한 국서를 쉽게 해석하고, 그 답서를 신라의 자주적 외교의 입장을 드러내 유창하게 지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강수는 청렴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재물에 뜻이 없어 집안이 가난하였는데, 이를 안 왕이 쌀 1백석을 하사 하였다.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우며 사찬 벼슬에 올랐다. 신문왕때 설총과 함께 국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신라는 불교 중심 사회였지만 강수는 유교적 도덕과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왕과 신하, 백성 사이의 올바른 도리를 제시하며 신라의 유교적 질서 확립에 기여했다. 또한 강수는 뛰어난 한문 실력과 문장력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 받았다. 비록 강수가 남긴 작품은 현존 하지 않지만 그의 문장력과 학문적 재능이 신라 문학과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혜초(慧超 704년~787년)

  혜초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로 인도에서 육로로 불교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페르시아 일부 지역까지 여행했으며, 천축국(오늘날 인도)을 갔다 온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787년에 중국의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하였다.

 

장보고(787년~846년)

  통일신라 말기 해상 교역을 장악했던 장군이자 무역 상인으로 해상 호족이었다. 동아시아 해상 방어를 강화하고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다. 그는 신라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당나라에 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해상 활동은 동아시아 정치와 경제에 큰 변화를 주었다

신라의 위인 강수 혜초 장보고 최치원

청해진이 설치와 해상무역 독점

  장보고는 출신과 계통에 대해서 기록이 알려 지지 않았다. 일찍부터 당나라로 건너가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여 군인으로 경력을 쌓으며 당나라에서 장군까지 승진하며 신라 출신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당나라에서 해적이 신라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것을 본 장보고는 흥덕왕 3년(828년)에 신라로 돌아와 군사 거점을 세워 이를 금지 시켜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은 장보고는 군사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하고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해상 무역을 장악하며 대사(大使)가 되었다. 

해적 소탕과 해상 방어 강화

  장보고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 신라 노예 매매는 해상에서 사라졌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에 해적이 많았는데 청해진을 군사 기지로 삼아 해적을 소탕하고 안전한 무역로를 확보하였다. 청해진은 해적을 방어하며 한반도, 중국, 일본을 오가는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동아시아 전역에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적 교류

  해적이 거의 사라지자 장보고는 청해진을 군사시설에서 무역의 중심지로 바꾸었다. 장보고는 당시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통해 신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당나라에서는 이미 장보고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명성은 신라가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교역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장보고는 일본과의 무역을 확대하여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를 유지 했고 신라 상인들이 일본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왕위 계승 문제와 정치 개입

  청해진에서 힘을 키운 장보고는 김우징(45대 신무왕 839년)이 왕이 되는데 도움을 주면서 높은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장보고는 딸을 신라 왕실과 혼인시켜 신라 내에서도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장보고의 신분이 낮아 귀족들은 골품제를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였다. 또한 장보고의 힘이 계속 커지는 것이 두려운 신라 왕실은 그를 암살 하였고, 장보고가 죽자 청해진도 사라지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 857년 ~ ? )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문신, 유학자, 문장가, 그리고 사상가로 유교적 학문과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중국과 신라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문재(文才)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중국 당나라에서의 활동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진골까지 만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신라의 골품제로 인해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자로서 학문을 깊이 쌓았으며, 6년 만인 18세에는 당나라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하여 당나라 관리로 임용되었다. 몇 년 후 당나라에서 일어난 반라, 황소의 난(875~884) 당시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인 '토황소격문'을 작성하여 반란군을 무너뜨리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당나라에서 학식과 문재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최치원은 혼란스러운 당나라에서의 관직에 한계를 느끼고 29세에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 귀국 후 신라 사회 개혁 노력

  885년에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쌓은 학문과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신라 헌강왕(857~861)은 최치원을 반기며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였으나 진골 귀족들의 방해로 제대로 뜻을 펼질 수 없었다. 결국 최치원은 수도를 떠나 지방의 관리가 되는 길을 택했고 신라는 갈 수록 혼란해 졌다. 이에 최치원은 10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사회적 개혁안인 '시무십여조'를 써 바뀐 왕인 진성여왕(887~897)에게 상소하면서 아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들의 건센 반발로 신분제의 한계를 느끼며 관직을 내놓고 도교와 불교에 심취하며 유랑생활을 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으며 경주 최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문학적 업적과 한국 한문학의  발전

최치원은 다수의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한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 하였다. 

계원필경 :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와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지었던 시와 산문, 격문 등의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문집이다. 또한 당나라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면서 최치원의 학문적 깊이와 문학적 성취를 보여 주며 한국 한문학의 기틀을 다진 중요한 작품으로 문자와 글솜씨가 매우 뛰어나 후대에 까지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힌다.

사상적 성과와 후대 영향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 사상에 이르기 까지 두루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문장가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한 사상가 이다. 그는 신라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개혁을 주장했지만 신라 사회의 쇠퇴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후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후대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최치원은 신라의 혼란기 속에서 사회 개혁을 추구하고 뛰어난 학문과 문학적 업적으로 후대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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