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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고구려의 건국과 주몽의 지도력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5.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고주몽(동명성왕)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704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존속 했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고대 국가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점유했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멸망 이후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통합하며 빠르게 성장한 나라이다.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는 주몽의 신화적인 탄생과 함께 시작되며 이는 고구려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 때부터 '고려'라고 불렀지만 한국사에서는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 부른다)

고구려의 건국과 주몽의 지도력

주몽의 건국 신화

  주몽의 건국 신화는 그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중요한 이야기다. 

  동부여에서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금와는 사냥에 나섰다가 백두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라는 여인을 만났다. 유화는 물을 관장하는 신인 화백의 첫째 딸이었는데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의 유혹에 빠져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혼인 하였다. 그뒤 하백의 노여움을 산 유화는 궁궐에서 쫓겨나 살고 있었는데, 금와왕은 이를 불쌍히 여겨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유화의 몸에는 항상 햇빛이 따라다녔고, 얼마 후 유화는 커다란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어 알을 내다 버렸으나 짐승들이 먹지도 않고 밟지도 않았으며 온갖 새들이 날아와 깃털로 감싸주었다. 심지어 금와왕이 도끼로 알을 내리쳐 보기도 했지만 알은 깨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금와왕은 유화에게 알을 다시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듯하게 덮어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의 주몽이라 불렀다. 

 

부여를 떠나 새로운 나라로

주몽은 어릴때 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영특하고 비범한 주몽을 질투한 금와왕의 일곱 아들들은 주몽을 죽이고자 했다. 이에 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권유를 받아 오이, 마리, 협부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엄리대수를 신통하게 건너 모둔곡에서 재사, 모록, 복거등과 함께 졸본천(현재 중국 동북)에 이르렀다. 이 지역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주몽은 졸본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그곳에서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구려의 건국과 주몽의 지도력

주몽은 부여를 떠나 졸본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그는 뛰어난 결단력과 지도력, 군사 전략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고,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높은 산과 강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가 지리적 방어력과 힘을 가진 나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초창기 고구려의 국력은 주몽의 지도하에 빠르게 성장하였다. 주몽은 뛰어난 전투 능력과 외교적 수완으로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고, 신뢰와 소통으로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켰다. 그의 리더십은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고구려는 주몽 이후에도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며 한반도 부부와 만주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주몽 이후 고구려의 발전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이후 그의 아들 유리왕에게 계승되었다. 유리왕은 주몽의 업적을 이어받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고구려는 뛰어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광개토대왕(재위 391년~412년)과 장수왕(재위 412년~491년) 같은 강력한 왕들에 의해 고구려의 국력과 위상을 크게 높여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며,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실제 역사적 배경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혼란스러웠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고구려는 주몽의 신화적 출생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나라였다. 주몽은 고구려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자 나라의 기틀을 다진 영웅

으로 기억되었으며 이는 고구려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중요한 부분으로 후대 고려의 건국으로 이어진다.

 

[ 북부여의 왕인 해루부의 아들 우태는 소서노라고 불리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바로 형 비류와 동생 온조이다. 그러나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으로 망명한 주몽과 재혼하였다.  주몽은 소서노와 두 형제를 잘 보살펴 주었고, 소서노는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부여에서 예씨와 혼인하여 얻은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은 유리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그러자 형인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말하기를 대왕의 업적이 크고 우리를 잘 보살펴 주었으나, 이제는 나라가 유리의 손에 들어갔으니 다른 나라를 세우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대수와 패수를 건너 미추홀과 위례성에 나라(백제)를 건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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