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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고구려 왕 1대 고주몽 동명성왕 2대 유리왕 9대 고국천왕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5.

  고구려의 역사는 고주몽 동명성왕으로 시작해 많은 위대한 왕들의 통치 아래 번영과 확장을 거듭해 왔다. 그중에서도 동명성왕, 유리왕, 고국천왕은 고구려의 기틀을 다지고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 동명성왕은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고, 초기 왕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의 아들 유리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영토를 확장하고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였다. 고국천왕은 고구려의 9대 왕으로 농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번영을 이끌었다. 이들의 통치는 고구려가 한반도의 강국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구려 왕 1대 고주몽 동명성왕 2대 유리왕 9대 고국천왕

1대 동명성왕(재위 BC37~BC19)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부여의 왕자였지만, 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기원전 37년에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압록강 인근 졸본에 새로운 나라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건국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초기엔 소수의 백성과 시작했지만 점차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구려를 안정시키고, 고구려 영토 확장의 기반을 다지면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켰다. 주몽은 고구를 부여의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켜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을 바탕으로 왕권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로 따라 고구려는 초기부터 강력한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동명성왕의 호칭은 '동쪽의 명왕'의 의미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후 동쪽 지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음을 나타내며 고구려의 초대 왕으로 국가를 세우고 발전시켜 그를 '성왕'으로 칭하고 주몽의 신성한 출생과 고구려의 건국자로서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주몽의 탄생설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은 첫째 딸 유화가 본인의 허락 없이 해모수와 만나자 크게 노하여 유화를 귀양 보냈다. 이후 동부여의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로 나들이 갔다가 유화를 만나 그 처지를 불쌍히 여겨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녀를 향하여 햋빛이 계속 비치더니 마침내 유화는 커다란 알을 낳았다. 그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유화에게서 알을 빼앗아 짐승들에게 던졌으나 도리어 소중히 여기며 알을 피해 가고, 새들은 깃으로 알을 감쌌다. 이에 금와왕이 도끼로 알을 내리쳐 보았지만 알은 깨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금와왕은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으며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 주었다. 며칠 뒤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어릴때 부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고,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의 주몽이라 불렀다.

(해모수의 '해'는 태양을 뜻하며 천손을 의미한다)

 

주몽은 자라면서 금와왕의 아들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껴 어머니 유화부인과 함께 부여를 떠났다. 주몽은 남하하여 졸본에 정착하여 그곳의 세력가 연타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하였다. 소서노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庶孫 서자의 자손)인 우태와 처음에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사망하자 동명성왕과 혼인하여 그를 도와 고구려 건국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부여에서 예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가 고구려에 오자 주몽과 결별한 소서노는 두 아들 비류, 온조와 함께 남하 하여 백제(온조)를 건국했다.

 

2대 유리명왕(재위 BC19~AD18년)

1대 동명성왕의 맏아들, 유리왕 22년에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주몽의 첫째 아들인 유리왕은 고구려 초기 정치적 안정을 이끌었던 왕이다.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며 고구려의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고, 왕권을 강화하며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특히 고구려의 내적 결속력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왕으로 평가된다. 

 

유리왕은 주몽과 부여의 예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의 젓째 아들이다. 부여에서 지내던 유리는 고구려를 건국한 아버지 주몽을 찾아 고구려의 왕위를 이어받음으로 고구려의 초기 왕권이 안정적으로 계승되었다. 유리왕은 고구려의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현재 중국 지린성 지안)으로 옮기며 보다 전략적이고 방어에 유리한 위치에서 국가를 운영하여 고구려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사냥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으며, 왕권을 강화하며 주변 부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 노력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서정시 유리왕의 '황조가'

"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 ? "

유리왕은 기원전 17년에 골천(鶻川)사람의 딸 '화희'와 한나라 출신 '치희'라는 두 후궁을 맞아들였다. 화희에 비해 치희가 아름다웠으나 화희가 치희를 천하게 여겨 자주 다투었다. 이에 치희는 수치심을 느끼고 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리왕이 치희를 되찾기 위해 따라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유리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노래다.

 

9대 고국천왕(재위 179년~197년)

  8대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며 왕위의 부자 상속을 확립하였다. 국상으로 농부인 을파소를 등용하였으며,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민 구휼책을 마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고국천왕은 고구려의 9대 왕으로 그의 치세는 179년부터 197년까지 21년간 이어졌다. 그의 즉위 이전에 왕권이 비교적 약하고 귀족들의 힘이 강했지만 고국천왕의 즉위 이후 고구려 왕실 내에서 왕권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고국천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구려의 강력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평민 출신의 을파소를 등용하여 국상에 임명하였다. 구신(舊臣)들이 신진 세력인 을파소를 참소하자 왕은 "국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할 것이다"라고 포고하였다. 을파소는 이에 감동하여 정치에 힘써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의 안팎이 평안했다. 초기 고구려는 귀족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왕권이 불안정했지만, 고국천왕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부족 5부 체제를 5방위로 전환하여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치체제가 더욱 정교해졌다.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면서 귀족들의 힘을 줄이고 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고국천왕의 개혁을 통해 왕권은 점차 안정되었다. 

 

진대법의 시행은 고국천왕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진대법은 구휼책으로 봄철에 국고에 있는 곡식을 가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있게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가 끝난 후에 낮은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 백성들은 흉년이나 재해로 어려움을 겪을 때 경제적 어려움을 덜 수 있었고, 스스로 귀족의 노비가 되는 것을 막고, 귀족들의 수탈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국가 통제 아래 역을 지고 조세를 납부할 국가 공민(公民)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국천왕의 권력 집중을 위한 정치적 전략이기도 한 진대법은 고구려의 사회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에도 고구려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중요한 제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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