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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고구려의 왕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5.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고구려 역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왕이다. 광개토대왕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재위하며 정복 전쟁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북으로는 만주와 연해주,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지배하며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대업을 이어받아 남진 정책을 통해 백제를 압박하고 한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고구려 통치 치세 시기는 고구려의 전성기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고구려의 왕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1년~412년)

18대 고국양왕의 아들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많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은 18대 고국양왕의 아들로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군사적, 정치적 발전을 통해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한국 최초의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 중심의 연호 체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의 위상과 독립적 자주성을 나타냈다. 재위 시 영락대왕으로 불렸으며 동예를 통합하고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영토확장 

 광개토대왕의 군사 활동을 통해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이와 같은 정복 활동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 고구려의 활발한 영토확장을 보여준다 

 

백제 공격(396년) :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의 대립 이후에도 백제와 고구려는 계속해서 충돌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백제를 크게 무너뜨렸고, 한강 일부를 장악하며 남하 정책을 더욱 구체화 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거란과 비류정벌 (396년~398년) :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아오고, 비류 등의 북방 세력을 제압하고 고구려의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북쪽과 서쪽에서도 활발한 군사 활동을 전개 하였다.

 

신라 보호(400년) : 신라 내물마립간이 왜(일본)의 침략을 받자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광개토대왕은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치며 신라를 보호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고구려는 신라와의 동맹을 통해 한반도 남부까지 고구려의 힘이 미쳤다. 

 

요동지역 정복(410년) : 광개토대왕은 만주 지역의 동부여를 정복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동쪽으로 크게 확장함으로써 만주와 한반도 북방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에서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력을 강화 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중국 지린성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비석은 고구려의 위상과 군사적 성과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대 장수왕(재위 413년~491년)

  장수왕은 광개토 대왕의 아들로 97세에 승하하여 78년의 기나긴 재위 기간을 마쳤다. 장수왕은 긴 장(長), 목숨 수(壽) 말 그대로 '긴 수명'이라는 뜻이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계승 발전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강력한 군사력과 외교 전략을 통해 고구려 영토를 확장하고 수도를 옮기면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했다. 장수왕의 통치 아래 고구려는 문화와 경제가 번영하였고 그의 업적은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평양 천도

  장수왕은 재위 15년(427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현재의 중국 지안)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평양 천도는 남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요한 결정이었으며 이는 남쪽의 백제와 신라도 자극과 위협을 받으며 세 나라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을 장악하고,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의 견제를 가능하게 했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높이면서 더 큰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평양은 한강과 대동강을 통해 중국이나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기에 매우 편리한 위치에 있으며, 황해도의 기름진 평야를 포함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조선 시대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남진 정책과 백제 공격

  장수왕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백제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475년에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현재의 서울)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한강 유역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백제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겼고,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와의 패권 다툼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보냈다. 도림은 백제 개로왕에게 찾아가 그가 좋아하는 바둑으로 마음을 얻었을 때 백제가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궁궐을 화려하게 짓고, 둑을 쌓는 큰 공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개로왕은 수많은 백성들에게 큰 공사를 하게 하여 백제의 국력을 약하게 만들었다.) 

중앙 집권 강화

  장수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적인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관료 체제를 정비했다. 이를 통해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이 더욱 강력해 졌다.  또한 불교를 후원하여 왕권을 신성화하고 고구려의 사회 안정과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분열된 중국 남북조와 외교 관계 강화

  장수왕은 국력 강화를 통해 중국의 남조[송(宋), 제(濟)] , 북연, 선비족이 세운 북위 사이에서 균형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며 고구려의 중립 외교를 강화했다 이로 인해 장수왕은 중국 다른 나라들과 큰 전쟁 없이 외교술로 고구려를 강한 나라로 성장 시켰다. 또한 장수왕은 고구려 뿐만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뛰어난 왕으로 평가받았으며, 북위 황제는 장수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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