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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고구려의 700년 역사와 함께한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6.

  기원전 37년 한반도 북부지역에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는 700년 역사 속에서 탁월한 지도력과 군사 전략으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이들은 고구려의 국경을 지키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고구려의 존엄을 지켜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의 업적을 통해 고구려의 위대함과 문화적 유산을 다시금 새겨 보자.

 

고구려의 700년 역사와 함께한 을지문덕 장군과 대막리지 연개소문

 

  을지문덕 (乙支文德 생몰 미상)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자 무장이며, 고구려 역사 속에서 탁월한 지략과 용맹으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영웅으로 손꼽힌다. 612년 제 2차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뛰어난 전략으로 수나라의 대군을 살수에서 물리쳐 대승을 거두어 고구려를 지켜냈으며, 이는 을지문덕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살수대첩이다.

 

 

  589년 중국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문제는 1차 3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에 참패하였다. 이후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에 그의 아들 수 양제가 2차로 113만명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출병하였으나, 요동성 전선에서 발목이 잡혔다. 이에 수나라는 우문술, 우중문 등 30만5천명의 별도대를 조직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으로 곧장 진군하게 하였으며, 압록강을 건너온 수나라 군은 부족한 식량과 군비 물자에도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하루 7차례 겨뤄 모두 이겼다. 승리에 도취한 수나라 군대는 계속 진격하여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왔으나, 수나라 군대는 지칠 대로 지쳤으며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였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거짓 항복 서신을 보내자 수나라 군사는 결국 이를 명분 삼아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 군사들이 방진을 치며 퇴각하자 을지문덕은 끈질기게 추격하며 싸우기를 반복하였다. 음력 7월 수나라군이 살수에 이르러 반 즈음 건너자 을지문덕의 반격으로 뒤에서 후 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요동으로 되돌아간 자가 겨우 2,700명이었다. 이에 수 양제는 크게 노하였으며 제 2차 여수 전쟁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침착하고 굳센 성격과 뛰어난 전략과 지략을 발휘해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는 시(여수장 우중문시)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신비로운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다하였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신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싸움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2차 여수 전쟁의 살수대첩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이며, 문무를 겸비한 을지문덕의 이름을 후대에까지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개소문(淵蓋蘇文 ? ~ 666년)

  연개소문은 영류왕 25년(642년) 대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대막지리를 신설하고 연개소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으로 세습되는 연씨 정권 26년 무인 정권을 세워 고구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연개소문은 연태조의 아들로 연태조는 부자상속이 가능한 고구려 최고 관직인 동부대인 겸 대대로(현 총리)라는 직책이었는데, 연태조가 사망하자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직위 상속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연태조의 후임으로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 역할을 밭아 이를 계기로 장안성의 중앙정계에 발 들였다. 

 

영류왕 14년(631년)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을 때, 왕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장성 축조 감독을 지시 하였다. 온건파 외교론자인 영류왕과 대신들은 강경파 외교론자인 연개소문의 성품을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를 먼저 눈치챈 연개소문은 자신이 통솔하는 군사의 거짓 사열식에 귀족 100여명을 초대하여 모두 살해하고 궁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였던 보장왕을 옹립하는 난을 일으키며 자신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으며, 당나라에 대해서는 강경책으로 고구려를 이끌었다.

( 수나라 멸망 후 세워진 당나라 사신 진대덕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이긴 사건을 기념하는 승전 기념탑을 허물고, 전사자의 유골을 모아 장례를 치러서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고구려군에 잡힌 수나라 군사들을 만나며 고구려의 실정을 조사하였음에도 항의하거나 추방하지 않았다. 또한 포로로 잡혀있던 수나라 군사 1만 명을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조건 없이 환송했고, 왕세자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기도 했다. 영류왕의 당나라에 대한 저자세 외교에 대한 반감의 원인으로, 연개소문이 주장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군부에서  난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했을 것으로 본다. )

 

  보장왕 1년(642년)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잃었고, 643년 고구려가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였으며 석두성을 되찾았다.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백제 공격에 대비한 군사를 요청하러 오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군사 요청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신라가 과거에 빼앗아간 죽령과 조령 이북땅을 돌려주면 군사 요청을 수락 한다고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김춘추를 고구려에 감금하였다. 연개소문은 이후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였고,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보장왕 2년(643년)  3월에 연개소문은 당에서 도교를 수입하여 기존 귀족 세력인 불교 세력을 견제 하고, 평양에 새로운 용언성을 쌓았다.  

 

  보장왕 3년(644년)에 연개소문이 신라를 공격하자 당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 공격을 중지 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해 두 개의 성을 차지한 상태였고, 보장왕의 명으로 소환된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신에게 과거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 했을때 신라가 그 틈을 노려 빼앗아 간 고구려의 옛영토 6백리를 돌려줄 때까지 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며, 당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당나라 사신을 감금해 버렸다. 645년 고구려를 공격할 명분을 찾던 당 태종은 상당한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고구려가 사신을 가둔 것을 빌미로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당나라는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나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과 연개소문의 협공으로 인해 당나라가 패배함으로써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 전쟁은 실패하였다. 

 

보장왕 22년(662년) 봄 당나라 방효태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사수 강가에서 연개소문의 군대에 포위되어 10만명에 달하는 전군이 물살 당하고 방효태 자신도 13명의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수전투) 평양을 포위했던 당나라 소정방도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수송해 준 군량을 받고 폭설을 이유로 곧장 철수하였으며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연개소문은 대단히 뛰어난 군사 지휘자이며 위대한 전략가로 고구려의 위신을 드높인 영웅이다. 하지만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해 고구려의 시대를 새롭게 열지는 못했다. 또한 후계자 선정에 실패하여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보장왕 24년(665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사후 고구려는 다시 정치적 혼에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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