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에서는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은 각각의 중요한 시기에 고구려를 통치하며 나라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양왕은 590년에 즉위하여 중국 수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며, 이를 통해 고구려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영류왕은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며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힘썼지만, 연개소문과의 갈등으로 고구려 내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였다. 마지막으로 보장왕은 642년에 즉위하여 고구려의 마지막 시기를 이끌었으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 왕들의 통치는 고구려의 마지막 전성기이며, 고구려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26대 영양왕(재위 590년~618년)
영양왕은 25대 평원왕의 맏아들로 평강공주와 남매사이다. 영양왕 재위 시기 중국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에 4차례에 쳐들어와, 격렬하게 전쟁을 벌이던 시기로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에서 수나라군을 섬멸했다.6세기 중렵 내란으로 무너진 고구려를 다시 일으킨 고구려 후기 명군이자 성군이다. 그는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고구려의 국력을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차 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영양왕 시기의 고구려는 외부적으로는 외세와 싸움,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고구려 수나라 전쟁 : 평양성 전투, 살수대첩
수나라 황제 수양제는 113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 하였다. 하지만 양쪽이 서로 총력전에 들어가 수양제는 요동 점령을 실패하였다. 이에 수나라 육군은 우중문을 총 사령관으로 하고 바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하루 동안 7번이나 져주며 수나라군이 계속 쫓아 오도록 만들었다. 이후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는 내용의 편지를 다시 보냈고 수나라 군대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을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렀을때 총공격으로 수나라 군대대는 30만명중 겨후 2700명만 살아 남았다. 이후 2차례 더 공격 했지만 실패하였다.
589년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는 수문제와 수양제 부자가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며 4차례 모두 패하였다. 수나라는 빈번한 대외 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점차 몰락하고 있었다. 결국 618년 수양제는 피살당하고 619년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전쟁으로 힘들어진 국력을 회복 시키는중에 9월에 영양왕도 승하하였다.
영양왕은 아버지 평원왕 시절 시작된 대외 교류를 계승하여 일본과 활발한사신 교류를 이어갔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승려 담징과 법정을 파견해 종이와 먹을 전파하고, 나라현의 호류지 벽화를 그리게 하는등 문화 교류에 큰 힘을 쏟았다. 이시기에 왜국에서는 중국 남북조의 불교 문화가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27대 영류왕(재위 618년~643년)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연개소문에게 감독을 맞겼다. 연개소문에 으해 비참하게 죽었다
영류왕은 즉위후 왕권 강화와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시도 했지만 귀족 세력과 갈등이 깊어지며 실질적인 개혁이 어려움을 겪었다.
영류왕시기 중국은 당나라가 건국되어 초기에는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 유지를 시도 했으나 고구려 지배 의도가 드러나 긴강 관계가 형성되었다 영류왕은 요동 땅에 천리장성을 싸흐며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건설의 책임자로 당나라와 강경한 정책을 주장하며 당과의 외교도 반대하였다. 이와 달리 영류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를선호하여 왕과 연개소문의 갈등이 고조된다. 이에 642년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폐위하여 죽이고 영류왕 조카인 보장왕을 새 왕으로 옵립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고루려는 중앙 권력과 귀족 세력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 침입에 대비할 체제도 갖추지 못했다.
28대 보장왕(재위642년~668년)
보장왕은 고구려 마지막으로 642년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제거하고 그의 사촌동생인 보장왕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했다. 실제 정치적 실권은 대막지리로 부상한 연개소문에게 있었다 보장왕은 왕위에 있었지만 연개소문에 의해 실권이 분산되며 중앙집권적 통치가 어려워 졌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당나라는 여러 차례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고구려는 이를 방어하며 지속적으로 당나라와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국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 남생, 남건, 남산이 후계 자리를 두고 권력 다툼을 벌여 고구려 내부 분열을 초래해 중앙 권력의 약화를 가속시켰다. 특히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고구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당나라는 신라와 손잡고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고구려를 압박했으며 668년 연합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연합군에 맞서 싸웠지만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보장왕은 당나라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며 고구려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보장왕은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부적인 분열과 외부침략에 의해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보장와의 폐위와 고구려의 멸망은 한반도 삼국시대의 종말을 의미하고 이후 통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마자 바로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라는 나라를 건국해 고구려의 유지를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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