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서는 왕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적 위인들이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이들은 정치, 군사, 학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기며 신라를 강력한 통신 국가로 만들어 나갔다. 여기에서는 신라를 대표하는 위인들의 주요 업적을 연도 순으로 알아본다
1. 김유신(595년~673년)
김유신은 신라를 상징하는 명장으로 진평왕부터 문무왕에 이르기 까지 8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5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신라의 삼한 일통을 위한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 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으로 추앙받았다.
- 금관국의 후손
김유신은 금관국을 세운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으며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인 김무력의 장남이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며 골품은 진골이다. 그의 둘째 여동생 문희는 김춘추(태종 무열왕)와 결혼하여 훗날 문명황후가 되었다.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 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추대 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이때 김유신이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매제인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 황산벌전투
660년경 황산벌에서 신라의 나당연합군과 백제군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다. 김유신은 5만의 신라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5천 군사의 계백과 맞서 싸웠으나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 하였다. 결국 백제의 패배로 계백 장군은 전사하였고, 의자왕은 항복하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은 당나라 포로로 끌려갔다. 백제 계백의 결사대보다 10배가 많은 신라 김유신의 군사는 전투에서 하루 지체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김유신이 계백에게 패배한 전투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천관사
경상북도 경주의 남산 서쪽 기슭에 현재 석재와 기와 조각들만 남은 절터가 논 한가운데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 있던 절로 김유신과 천관이라는 기생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화랑 김유신은 젊었을 때 천관이라는 기생을 가까이 해 그 집에 자주 드나들곤 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이를 꾸짖자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어느날 술에 취해 말을 타고 오다 잠이 들었는데 말이 술에 취한 유신을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가자 유신은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왔다. 이를 슬퍼한 천관이 자살을 하고 후에 유신은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이 살던 집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 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원효대사(617년~686년)
원효는 신라의 고승이자 학자이며, 사상가, 작사, 시인, 정치가 이다.
원효는 6두품 출신으로 나면서부터 남보다 총명하고 기억력 또한 뛰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원효는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어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 하였다. 어머니 조 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다가 출가하였다. 승려가 되어 황룡사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사라사(裟羅寺)라는 절을 세웠다.
원효는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원효는 650년(진덕왕 4년) 당시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수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 받았다가 풀려났다. 661년(문무왕 1년) 당시 45세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경기도 화성 성곽)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원효는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 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 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분황사에 주로 머무르며 활발한 불교 연구와 저술 활동에 열중했다.
" 모든 것은 곧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
이후 원효는 분황사에 있으며 독자적으로 '일심사상'과 '화쟁사상'을 주창하며 종파 간 화합을 도모하며 불교를 일반 백성에게 널리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화쟁(和諍)사상 - 다양한 불교 사상과 종파가 겉으로는 다르게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 같은 진리를 추구하여 각각 종파는 독립적이 진리라기 보다는 하나의 진리를 다양한 관점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불교의 진정한 가르침은 대립과 논쟁을 초월한 하나의 진리로 이해 하자.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사이에 설총을 낳았으며 70세 되던 해 수많은 저서(대승기신론 등)를 남기고 혈사(穴寺) (경주시 양북면 소재 골굴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원효는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시키고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삼국통일 당시 당나라 고승들이 원효대사를 매우 존경 했으며 동북아 국가들의 왕은 최고의 고승을 국사, 왕사로 두어 각종 정책 결정에 권고받았으며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삼국 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의상대사( 義湘 625년~702년)
의상은 통일신라 진골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 제2대 조사인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을 수학하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통일신라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다.
의상은 진골 귀족 출신으로 촉망받던 화랑 이었으나, 전쟁에 참여할 때 전장에서 살육을 한 후 생긴 죄책감과 회의감, 그로 인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점으로 20세에 출가하였다. 650년(진덕여왕 4년)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중 당항성의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자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도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여 그와 헤어진다. 그 후 의상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지엄(至嚴 중국 화엄종의 제2대 조사)의 문하에서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670년(문무왕 10)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문무왕에게 알리기 위해 귀국했다.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 낙산사)에서 백일기도하고 676년 왕의 뜻을 받아 영주 봉황산에 부석사 등 화엄 10여개의 찰을 창건하고 화엄 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설총(655년 ~ )
설총은 6두품 출신으로 통일신라의 유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며 아버지는 원효대사, 어머니는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이다. 신라 신문왕 때 국학에서 수학 하였고 746년부터 강수와 함께 박사에 임명되어 학생들에게 구경을 가르쳤다. 중국 한자를 신라어로 해석한 이두를 집대성하여 백성들이 한자를 빌려 한국어 표기 할 수 있게 되어 신라의 학문과 행정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한국어 문장을 기록하는 표기법으로 이두의 체계화는 당시 한국어로 문서 작성과 기록이 가능해지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교육과 학문이 더 널리 보급되는데 기여했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의 불교사상과 달리 유교적 사상을 중시하며 신라에 유교를 전파했다. 왕과 신하의 도리를 강조하며 신문왕에게 유교 윤리관을 건의하여 신라의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신문왕이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국학을 통해 유교 교육을 장려하는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꽃들을 통해 왕과 신하의 관계, 도리와 예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화왕계"(신문왕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짐)를 저술하여 왕에게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며 신라 사회에 유교 윤리를 뿌리 내리도록 하였다.
설총은 뛰어난 문장과 학식으로 앞 세대의 강수, 후대의 최치원과 함께 신라 삼현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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