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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신라의 왕 박혁거세거서간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탈해이사금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3.

   고대 한반도 초기 삼국시대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각축을 벌인 시기이며, 신라는 2세세기 초 한나라와 전쟁에서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집단이 영남 진한지역으로 남하해 기원전 57년 6부촌의 협의로 고허촌 출신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건국하였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생겼으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까지 가장 오랜 걸렸다. 천년간 56명의 군주를 거치며 한국사 전체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한 국가이며, 1대 혁거세거서간부터 삼국을 통일한는 대업을 이루기까지 수많은 왕들이 존재했다.

신라의 왕 박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탈해 이사금

 

1대 혁거세거서간(재위 BC57~AD4)

  신라 최초의 왕 박씨의 시조

  혁거세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나 기원전 57년에 신라를 건국 하여 61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이는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 보다는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그는 신라의 시조이며, '거서간'은 원래 '왕'을 의미하는 말이다. 박혁거세는 여러 탄생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박혀거세 탄생 설화 : 기원전 69년경 한반도의 남동쪽 진한 지역인 경주 지방에 고허촌을 포함한 여섯마을이 모여사는 마을에 옛 고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고허촌 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릇ㄱ을 바라보다 나정 우물 옆 숲 사이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는것을 보았다. 촌장이 다가가 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보라색 알만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 알에서 남자 아이가 나왔다. 알이 마치 조롱박 처럼 생겼으니 성을 '박'씨로 하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박(朴)'은 그의 탄생 설화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혁거세'의 '혁'은 빛나고, '거세'는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혁거세란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그의 왕권과 위대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이름이다. 박혁거세가 13살이 되자 진한 6부의 사람들에게 존경받아 거서간으로 추대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로 짓고 수도를 금성으로 정했다. 혁거세가 거서간이 된지 5년뒤 알영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고 사라졌다. 사람들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우물 이름을 붙여 '알영'이라고 불렀으며, 알영은 자라서 혁거세 거서간의 왕비가 되었다.

 

신라 건국과 통치

박혁거세거서간은 나라를 다스리는 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으로서 신라를 통치하면서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며 신라의 시작을 알리므로 신라의 기틀을 다졌다. 혁거세의 치세 기간은 61년이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남아있는 자료를 보면 헉거세거서간의 사람됨을 알수 있다.(혁거세거서간 30년에 낙랑군이 침범해 왔지만 신라인들의 생활을 보고 '이 사람들은 서로 훔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라고 하며 물러 났으며, 왜인들이 쳐들어 왔다가 그냥 돌아간 적도 있었다. 또한 변한의 일부 지역에서는 직접 항복해 오기도 했다. 공물을 요구하던 마한의 왕이 죽자 어떤 신하가 이 기회에 마한을 쳐야 한다며 건의 하지만 혁거세왕은, "다른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며 마한에 사신을 보내고 위로를 전하였다.)

 

6부족 통합

신라는 원래 여섯 개의 부족(양산촌 이씨, 고허촌 최씨, 진지촌 정시, 대수촌 손씨, 가리촌 배씨, 고야촌 설씨}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박혁거세는 이들 부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기반을 마련함으로 인해 신라는 점차 강력한 고대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고, 박혁거세는 그 시작을 이끈 중요한 왕이다.

 

박혁거세 거서간의 업적

박혁거세거서간은 신라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여 나라를 안정시켰고, 초기 신라의 정치 구조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통치자는 '거서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신라의 초기 발전과 신라의 기반을 다졌다. 

 

2대 남해 차차웅(재위 4년~24년)

  남해차차웅은 박혁거세의  맏아들로,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24년까지 약 29년동안 왕으로 군림하였다. '차차웅'이라는 칭호는 신라 초기에 왕을 뜻하는 말로 차차웅은 제사장을 의미한다. 당시 신라는 제사장의 역할이 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남해 차차웅은 왕임녀서도 신과 인간을 잇는 제사장 역할을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칭호는 신라 사회에서 종교적 지도자가 정치적 권력까지 함께 하고 있던 시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남해차차웅은 신라 내분의 안정을 꾀하면서 안정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썼다. 특히 신라 6부족 연맹체의 통합을 더 강화하여 신라를 점차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한 기반을 다져 나가며 왜(일본)와의 교류와 갈등 관계를 해결해 신라의 안정을 유지하려 하였다. 남해차차웅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유리이사금이 왕우를 이어 받으며 신라의 왕위 계승은 부자 상속으로 이어졌고, 유리이사금은 신라의 세 번째 왕이 되었다.

 

남해 차차웅은 박혁거세의 뒤를 이어 초기 신라의 정치적 기반을 다진 왕으로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왕권을 안정시켰고, 부족간의 연합을 강화하면서 국가의 기초를 다져 신라가 더욱 발전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3대 유리 이사금(재위24년~57년)

  2대 남해차차웅의 아들(박싸)로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사금'은 신라의 왕을 부르는 칭호로, 유리이사금이 왕이 된 시기부터 이사금(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사금의 '금'이란 말은 ㄷ'대장'혹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왕권이 더욱 강화 되었음을 의미하는 칭호이다. 이는 신라 왕권이 전점 체계화되고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해진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유리이사금의 통치는 신라 내부의 안정을 유지하고,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6부족 연맹체를 더욱 강화하며, 관위 17등급의 기틀을 다져 신라의 정치 체제를 견고히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재산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정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신라의 법 제도와 사회 체계가 점차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리이사금은 신라의 세력을 더욱 확장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왕인 대무신왕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으며, 37년(즉위 14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낙랑 사람 5천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당시 신라는 아직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고구려와의 충돌은 신라의 국방을 외교적 역량을 시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왜(일본)와의 외교 관계에서 신라는 왜와 교류 갈등을 해결하며 신라의 국방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신라의 왕위 계승 제도를 정비하고, 부족간의 결속을 더욱 다지는데 힘쓰는 것으로 신라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문화적 발전으로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원시적 화장 조직)가 이 시기에 등장하며, 이는 신라의 청소년들이 무예와 덕복을 닦는 조직으로, 훗날 화랑도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유리이사금은 신라의 왕권을 강화하고, 법을 정비했으며, 고구려, 왜와의 외교갈등을 해결하며 국방력을 강화했다. 또한 원화를 조직하여 화랑도의 기초를 마련하고 왕위 계승 제도를 정비하여 신라 건국 초기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4대 탈해이사금(재위57년~80년)

 

  2대 남해차차웅의 사위(석씨)로 왜국의 다파나국 출신으로 석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24년 남해차차웅이 죽자 아들 유리는 탈해가 본래 덕망이 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유리이사금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석탈해가 왕이 되었다. 석탈해는 신라 초기 왕 중에서 특이하게 이방인 출신으로 전설에 따르면 바다를 건너 신라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재능을 가진 인물로 그의 출신 배경 덕분에 석씨는 신라의 박(朴), 김(金)씨와 함께 중요한 왕족 성씨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신라의 초기 왕조인 박씨가 아닌 석씨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박혁거세의 후손이 아닌 다른 성씨가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의 성씨가 다양화 되고 왕위 계승 구조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석탈해는 신라 내부의 안정을 유지하며 왕권을 강화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즉위 초기 59년에 왜와 수교를 하였으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인물이기 때문인지 해상 방어와 교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해양 세력과의 교류를 중시했다. 이는 신라가 동해를 중심으로 왜국과 교류하고, 외부 세력을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백제와는 계속 전시 상태였다. 석탈해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박혁거세의 후손 중에서 파사이사금을 후계자로 삼았다. 이는 박, 석씨 간이 평화로운 권력 승계를 나타내며, 왕위 계승에서 혈통 만큼이나 능력이 중시 되었음을 보여준다. 석탈해는 다른 나라에서 온 인물이었지만, 그 뛰어난 능력 덕분에 신라의 왕으로 인정받았기에, 신라 사회는 다양한 배경의 인물을 포용하고 능력을 중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석탈해가 신라 사회에 새로운 문화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며, 그가 통치하는 동안 왜국과의 교류가 더욱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탈해는 신라 초기 왕 중에서도 이방인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독특한 인물로 신라의 발전과 왕권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석탈해는 신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해양 교류를 중시하였고, 박혁거세의 후손을 후계자로 선택하여 평화로운 권력 승계를 이루었다. 또한, 다양한 배경의 인물을 포용하며 그들의 능력을 중시하는 신라 사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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