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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반도 고대국가 신라의 건국과 삼국통일 과정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2.

  신라는 한반도의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하였으며 삼국통일까지의 과정은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신라는 작은 부족 국가로 시작했지만 지혜로운 지도자들과 당나라와의 전략적인 동맹을 통해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며 한반도를 통일했다. 이에 한반도 고대국가 신라의 건국과 삼국통일 과정을 알아보자

한반도 고대국가 신라의 건국과 삼국통일 과정

신라의 건국과 초기 역사

  신라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였다. 기원전 69년경 한반도 중남부는 마한, 진한, 변한으로 이루어진 삼한시대로, 기원전 2세기 초 한나라와 전쟁에서 멸망한 고조선(기원전 108년)의 유민집단은 영남으로 남하하여 한반도의 동남부를 차지하며 진한 지역에 부족국가를 이루었다. 기원전 57년에 6부 촌의 협의로 양산촌 출신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건국하였으며,  경주 지역의 사로국이 그 시초이다. 이후 약 천 년간 56명의 군주를 거치며 한국사 전체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한 국가이다.

 

  신라(新羅)의 이름의 의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두 글자를 취한 것으로 덕이 날마다 새로워져서 동서남북의 것들을 널리 받아들여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고대국가로 거듭난 신라 왕위 세습되다

  신라는 지리적 특성상 태백산맥에 가로막혀 중국과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신라 초기에 박-석-김 세종류의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점차 왕권이 강해지면서 내물마립간(356년) 시기 부터 김씨가 세습을 하게 된다. 최고 지배자의 호칭도  왕(王)이라는 왕호(王號)를 쓰기전에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연장자, 이빨이 많은 사람), 마립간(대장군)으로 변했으며, 503년(지증왕4년)에 왕호를 확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국호도 초기에는 사로, 사라, 신라 등이 함께 사용되었으나 내물마립간이 중국에 보낸 사신을 통해 국호가 신라라고 칭했다 는 사실이 중국 사서에 나타난다.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 중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기한이 가장 명확하며 법흥왕(536)에 '건원'이라 연호를 사용하며 진덕여왕(650)까지 7차례 변경했다.

 

신라 백제와의 동맹으로 고구려를 견재하다.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으로 왜구를 격퇴한 400년경, 신라는 중앙 집권체제를 정비하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그러자 왕권이 강화되면서 고구려의 보호가 점차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이에 고구려의 장수왕(413~419년)이 남진 정책을 펼치자, 신라는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구를 물리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백제와 동맹으로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강력한 국가로의 도약을 시작하였다.

 

 

지증왕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다.

  지증왕(재위 500~514) 시기 왕권을 더 강화하고 지방 행정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지방을 군과 현으로 구분하였다.    한편 중앙집권 국가의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지배자의 호칭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으며 나라 이름도 사로국이라는 이름 대신 신라(新羅)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우산국(울릉도)를 정복하여 해양 영토 확장에도 앞장섰으며, 농경에 소를 사용하는 우경을 장려하여 농업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켜 신라의  경제적 기반도 튼튼하게 만들었다. 

 

법흥왕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다.

  법흥왕(재위 514~540) 재위 시기 신라는 단순한 부족국가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더욱 발전시켜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율령을 반포하고, 왕족과 귀족 계층을 명확히 구분하는 골품제(골족:타고난 귀족 혈통, 두품족:관리가 되는 지배층)를 완성하여 정치와 사회 구조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강화했다. 또한, 이차돈의 순교로 인해 신라에서 최초로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 체제와 종교가 결합하고 불교가 신라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중앙집권체제 기반의 마련으로 병부를 세워 금관가야를 멸망 시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진흥왕 화랑도를 만들고 영토를 확장하여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다

진흥왕(재위 540~576) 재위 시기 신라는 법흥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신라를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시키며 국력을 대외적으로 확장하였다.  화랑도를 바탕으로 백제로 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았으며, 한강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며 영토를 확장하여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고  진흥왕 4대 순수비를 세워  영토 확장을 기념했다. 이후 대가야를 정복하고 함경도 까지 진출했다. 화랑도는 '화랑+낭도'의  줄임말로 진골 출신 자제들의 화랑과 신분제한 없는 평민부터 진골까지 섞여 있는 낭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랑도는 이후 삼국통일 과정에서 매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백제의 공격, 김춘추는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다

진평왕(재위 579~632) 말년에 백제 의자왕은 성왕의 복수를 위해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고, 대야성 성주의 부인인 김춘추의 딸을 죽였다.  이에 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한강을 내 놓아야만 도와준다는 태도를 내세웠고, 김춘추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신라에 돌아가서 왕에게 이야기한 후 한강 지역을 돌려주겠다 하고 거짓말을 한뒤 고구려를 탈출하였다.

 

신라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시킨다.

고구려에서 탈출한 김춘추는 당나라 태종에게 달려가 군사동맹을 제안한다. 당 태종은 국경 확장을 위해 몇 차례 고구려 침입을 시도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기회를 보던 당나라는 신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당연합군이 형성된다. 나당연합군은 660년에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킨다.  668년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연개소문마저 죽음으로  그의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내부 정치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 틈을 타 백제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며,   결국 고구려는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된다. 

 

멸망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실패하였다

  660년 백제 멸망 후 주류성의 복신과 도침스님, 임존성에서 흑치상지등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인 풍왕자를 모셔와 왕으로 추대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내분으로 인해 663년 8월 백제와 왜의 군대가 신라와 당나라의 군대에게 크게 패하며 흑치상지는 부하들을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하여 백제 부흥은 실패하였다.  고구려의 왕족 안승은 당나라군을 피해 숨어 지내다 고구려 장군 검모잠을 만나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분열로 결국 검모잠은 안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안승은 신라에 투항하며 700년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실패하였다.

 

결국,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통일신라 시대를 열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백제, 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시켰지만,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옛 영토인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하려 했다. 이런 갈등으로 신라 문무왕(재위661~681)은 당나라와 7년간의 전쟁[매소성전투(675년), 기벌포 전투(676년)] 에서 승리하여 한반도 삼국을 통일하고 내부 정비를 거쳐 통일신라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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