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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반도 문명형성과 고조선 건국과 부여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2.

  최초 한반도 일대에 인류가 살았던 건 약 70만년 전이라고 추정되지만 구석기 시대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었다. 그 후 인류 출현은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신석기 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 인류출현과 문명의 형성 그리고 고조선의 건국과 부족국가 부여

  한반도 문명의 형성

  한반도 문명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유물이나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인 구석기 시대(70~30만 년 전), 신석기 시대(기원전 8000~6000년 전), 청동기 시대(기원전 1000년 전), 철기 시대(기원전 300년경)로 추정한다.

구석기 시대(70~30만년 전)

  구석기 시대의 생활은 주로 동굴에 거주하며 초기에는 주로 수렵과 채집 하며 무리 지어 생활하고 이동 생활을 했다. 그리고 불과 언어를 사용했으며 찍개나 주먹도끼 같은 뗀석기를 제작하고 주로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 생활을 했다

신석기 시대(기원전 만년 전)

  신석기 시대의 생활은 강가나 해안가에서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움집에 거주하며 정착 생활을 하며 촌락 공동체를 형성하고 농경과 목축을 시작은 신석기 혁명이라 불리며 간석기와 토기 제작뿐만 아니라 직조 기술도 발달했다.

  갈판과 갈돌은 곡식이나 열매를 가는 데 사용하고 가락바퀴는 실을 잣는 데 사용하였으며 빗살무늬토기는 음식을 조리하거나 곡식을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고조선의 건국(기원전 2333년경)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은 위만이 집권한 이후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크게 성장하였다. 고조선 멸망이 기원전 108년경임에는 확인되지만 건국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여러 문헌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다.

고조선은 건국 이후 꾸준한 영토 확장과 주변 지역 복속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는 등 매우 강성했던 편이었다. 초창기엔 중국과 교역하며 중국 문명권으로 동화되지 않으며 중국계 이주민도 유입되었다. 동호나 흉노 같은 다른 북방 민족에게도 일방적으로 밀리거나 복속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생각보다 국력이 강했던 나라이다. 국가 체계 자체는 귀족들이 지역별로 일정 수준 자치권을 가지는 형태의 연맹왕국으로 중앙 집권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국란과 분열은 취약한 면이 있었다. 고조선의 의복 문화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로 알려진 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오랑캐 옷을 입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남긴 문자 기록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7세기경 '둔황문서'중 하나인 <토원책부>에 인용된 <위략>의 내용에 (고조선에서는 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의 현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을 행했다) 내용이 있다. 동예의 제천행사로 알려진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점을 치는 풍습 또한 고조선의 풍습이었다.

고조선 사회가 높은 정도의 계급 분화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8조법 조항의 법 중 3개 조항은 현재까지 전해져서 당시 사유재산 보호조치와 화폐 개념 그리고 노비의 존재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해진 3개 조항은 <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 이다.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년~1500년경)

  청동기 시대는 세형동검,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고인돌과 함께 한반도 일대에서 발견되었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되며 그보다 발전한 세형동검의 거푸집이 발견되어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평안북도 의주 미송리에서 발견된 민무늬 토기는 이후 청천강 일대나 압록강 상류에서도 출토되었다.

 

  의례용 도구로 짐작되는 청동기는 농사를 짓는 모습이 표면에 새겨져 있다. 곡식을 이삭으로 자르는데 반달 돌칼을 사용하였으며 농경에도 석기를 사용하였다. 인천 강화의 고인들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어 청동기 시대에 계급이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울주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은 다양한 고래와 육지 동물을 새겨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경)

  기원전 3세기경 철기시대는 고조선의 등장과 함께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부여, 옥저, 동예,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등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또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업생산력이 매우 높아졌으며 철제 무기로 인해 정복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부족국가 부여

  부여는  만주 북쪽 지역인 송화강 중심을 지배층으로 한 다민족 고대국가이며 왕권이 약하고 부족장의 권한이 강한 상태로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연맹왕국으로 난생설화를 가진 동명왕을 시조로, 존속기간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기원전 4세기 ~ 494년으로 보고 있다.  고대 군장국가지만 고조선과는 별개의 문화를 형성하며 날씨가 추워 반은 농사짓고 반은 가축을 기른 반농반목의 형태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또한 백제, 고구려등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주요 국가의 왕가들이 부여계 국가에서 나왔으며 성 궁궐 감옥 창고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였다.

 

정치는 선거군주제 귀족 정치로 토테미즘에 근거해 군주왕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라는 4부족이 있었으며, 왕과 벼슬의 이름은 가축을 이름에 따라 마가, 우가, 저가, 구가(加)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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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의 국왕은 자연재해가 들거나 농사가 흉년이 들면 제사장 적인 성격이 강해 귀족회의에서 폐출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선거군주제 체제로 왕은 당대로서는 제사장 모양으로 제가들이 왕을 뽑았고 나라를 세우는 데 일조했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귀족들이 자기 부족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당연히 약해졌다.

 

  종교는 토착 신앙으로 추수가 끝나면 사냥하기 좋은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음주 가무를 즐기는 부여의 영고가 있었으며 노비제도로 인해 순장(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살아있는 가족을 함께 매장 하는것)의 대부분은 노비로 채웠다.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로 배상하게 했으며, 오곡이 익지 않으면 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했다.

 

  부여는 주로 터전이 평원이었으므로 농사를 짓는 농경 국가였으나 북방 평원에서 기른 말로 인해 기마술과 목축에도 능한 반농반목의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말이나 붉은 옥, 구슬 장식품, 담비나 돼지, 여우, 원숭이 등의 짐승 가죽을 중국에 수출했다. 부여인들은 강인하고 굳세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북방계 민족의 특징을 가지며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은 백의민족 문화는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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