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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700년 역사속 독창적인 문화와 예술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5.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에 의해 건국되어 668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약 700년 동안 존속하며,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고대 국가로 자리 잡았다. 특히 고구려는 지리적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아우르며, 당시 중국의 다양한 왕조들과 국겨을 맞대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고구려는 뛰어난 군사력과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을뿐 아니라 독특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고구려는 주로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 그리고 한반도 내 다른 부족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고유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고구려 700년 역사속의 창조적인 문화와 예술

 

고구려의 문화는 그들이 강대국으로서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들의 문화와 예술은 단순히 귀족이나 왕실에 국한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도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특히, 고구려는 무사 집단의 위상을 바탕으로 전투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를 추구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예술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전투 장면을 묘사한 벽화나 웅장한 성곽 건축물은 고구려의 강인한 정신과 용맹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예술은 단순한 장식이나 미적 표현을 넘어선 의미를 지녔다. 벽화, 공예품, 건축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속에는 고구려인들의 세계관, 종교적, 신념, 그리고 사회적 가치가 깃들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후세에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고구려 벽화 에는 고구려인의 삶과 영혼이 담겨있다.

  고구려인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적 유산중 하나는 고분 벽화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그들의 생활 사상과 관습등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 벽화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예술적 감각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벽화는 주로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 내부에 그려져 있다. 이 벽화들은 고구려의 사회와 문화, 생활, 종교 그리고 신앙을 담고 있다. 벽화의 주제는 다양하며, 주로 사후 세계에 대한 상징적 그림들(무덤 주인이 저승으로 가는 장면이나 사후 세계의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이외에도 고구려인들의 사냥하는 장면, 무술 훈련, 연회, 음악 공연 등이 그려져 있으며 고구려의 일상과 문화적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구려 벽화는 뛰어난 화풍과 선명한 색채로 당시의 건축양식, 의복, 무기, 그리고 종교적 상징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중국의 화풍과는 다른 독자적인 예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고구려인들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이 벽화들은 고구려가 외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활발한 나라였음을 증명하며, 그들의 강력한 왕권과 귀족 중심의 사회 구조를 시각적으로 나타내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될 만큼의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궁궐건축 웅장함과 실용성을 결합하다

  고구려의 건축은 그들의 실용적 지혜와 군사적 강점이 결합된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 지대를 활용하여 중국과 몽골에 대비해 요동 지역에 성곽을 쌓았고, 한반도 지역의 성곽들은 주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는데 쉽게 만들었다. 고구려의 요동 지역에 쌓은 성곽을 축조하는 기술은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편이었는데, 중국의 요새는 벽돌로 쌓아 만든 전성(傳城)이지만, 고구려의 성들은 대부분 화강암과 석회암으로 지은 석성이다. 고구려는 절벽을 따라서 계속해서 성벽을 축조해서, 어지간히 강력한 외부 침입에도 성벽을 제대로 무너뜨리기 어려웠다. 

 

고구려의 궁궐 건축은 실용성과 웅장함을 겸비한 구조로, 왕권의 상징 역할을 했다. 특히,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세운 안학궁(安鶴宮)은 한반도에 들어섰던 가장 거대한 궁전에 해당하며 고구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궁전이다. 안학궁은 방대한 면적과 복잡한 배치를 통해 고구려 왕실의 권위를 드러냈으며, 궁전 주변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연못과 정원도 함께 조성되었다. 이러한 궁궐 건축은 당시 고구려의 정치적,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동시에 예술적 감각을 반영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의 건축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실용적 기능과 함께 미적 가치를 모두 갖춘 형태로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공예와 도자기는 실용속에서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고구려의 공예품은 주로 토기와 금속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특히 금속공예는 당대 뛰어난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인들은 금속공예, 도자기, 목공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정교한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특히 고구려의 금속 공예품은 금과 은을 이용해 정교한 세공 기술을 바탕으로 화려함과 실용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의 금속 공예품은 주로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장식품이나 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금속으로 만든 장신구는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며, 왕족과 귀족들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또한 철제 갑옷과 무기는 고구려 군사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도자기는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으며 간결하면서도 실용적인 형태가 특징이다. 특히 검은색 또는 회색의 토기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인들이 중시하였던 실용성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단순함 속에서도 섬세한 조각과 무늬가 나타나 고구려 예술의 특징인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고구려인은 음악과 무용에서 고대인의 삶 속에 깃든 예술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삼국 중 가장 먼저 수나라와 당나라에 고구려의 악공과 무용수를 파견했다. 또한, 4세기 무렵 왕산악이 거문고를 창제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도 연주를 하였다. 또한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무용도에서는 연회 장면과 무용을 묘사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인들이 음악과 춤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사적 전통이 강한 고구려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식에서 음악과 무용을 중요하게 여겼다. 고구려의 악기는 대부분 타악기와 현악기였으며, 이러한 악기들은 중국과 주변 유목민족으 영향을 받았으나, 고구려의 방식으로 재해석 되었다. 음악과 무용은 단순한 오락의 수단을 넘어, 고구려 사회에서 종교적 의식이나 국가적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춤은 전투적이고 힘찬 동작이 특징이었으며, 이는 고구려의 전사적 기질과도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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